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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원야승(11) [ 2021.09.30 ]

[뉴스재팬=포사단필] 시중은행들은 1960년대부터 전문 인력 육성을 위하여 행원들의 해외연수를 실시했는데, 연수 대상지는 주로 본부 근무자 중에서 임의 선발하였다. 필자가 일한 은행은 1978년부터 해외연수¹⁾ 대상자를 공식적인 선발 절차인 시험을 거쳐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공정한 인사관리로 행원에게 자기개발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시험 과목은 실무(외국환업무)와 외국어(영어)였다.

과목별 배점은 실무와 외국어에 각 200점으로 동등한 비중을 두었고, 외국어는 듣기와 말하기에 각 100점으로 동등한 비중을 두되 평균 60점 이상이어야 합격이었다.

행내에서 치른 실무시험은 괜찮을 정도로 마쳤다. 외국어 시험은 객관적 평가를 위하여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현재 언어교육원)에서 치렀다. 영어 듣기시험을 먼저 치른 뒤 회화시험을 치렀는데, 시험관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국 여성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앉았더니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양복에 달고 있는 핀(pin)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배지(badge)라고 하는데 그녀는 핀이라고 말했다. 은행 배지라고 했더니 그것을 왜 달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내가 일하는 은행의 상징이며 조직에의 소속감과 직장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고 답했다. 짧은 문답이 계속되다가 얘기는 아이들로 옮겨갔다.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느냐?”
“자주 놀아주며 옛날 얘기도 해준다.”

아이들과 자주 놀아준다거나 옛날 얘기를 해준다는 말은 일부만 사실이었다. 일도 바빴던 데다 술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었고 나름대로 토플도 준비했던 시절이었기에 아침저녁 건성으로라도 아이들 얼굴을 보면 다행이었으니 체면상 그냥 말하기 쉽고 듣기 좋으라고 한 대답이었다.

“아이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냐?”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해준다.”

연년생 두 아이가 네 살, 다섯 살이었는데 옛날 얘기를 해준 기억이 없다. <창작과 비평>에서 펴낸 동화책 몇 권을 사다준 건 3~4년 뒤였다. 시험관은 흥미 있다는 듯 말했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해줄 수 있느냐?” 결국 시험관에게 걸려들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흥부와 놀부라는 형제가 살았는데, ⋯ 어느 해 봄 강남에서 온 제비가 흥부네 집 처마에 집을 짓고, ⋯ 새끼제비의 다리가 부러졌고, ⋯ 이듬해 봄에 그 제비가 ⋯. 옛날 얘기는 여기에서 멈췄다. ‘박’의 영어 단어를 몰랐던 거다.

이야기는 바야흐로 박을 타는 클라이맥스로 올라갈 참인데 ‘박’의 영어 단어를 모르다니 제 꾀에 넘어가 자초한 낭패였다. 어떻게든 시험관에게 ‘박’을 설명하여 이해시킨 다음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되는 난처한 처지에 몰렸는데 그녀가 물었다.

“호박(pumpkin) 말이냐?”
“펌킨이 아니라 농구 볼 만한 크기에 둥그렇고 색깔은 하얀 편이고.” 우물우물. 시험관은 노련했고 호의적이었다.
“그럼 ‘박’이라고 하고 이야기를 계속하기 바란다.”

회화시험은 이렇게 ‘배지’로 시작하여 ‘흥부와 놀부’ 얘기로 끝냈다. 신림2동에 살 때였기에 이놈의 ‘박’ 한 통이, 아니 이놈의 단어 하나가 사람을 잡는다고 곱씹으면서 집에까지 걸어갔다.

은행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어도 달고 다니던 배지에 값한 행원이었는지 자문할 때가 더러 있다. 지점장으로 일할 때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해 징계를 받은 기억 때문이다.

얼마 전에 강남 지역 한 국회의원이 배지를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영규 칼럼리스트

주.
1) 연수기간이 3~6월인 단기 해외연수를 말한다. 연수기간이 2년인 해외학술연수는 1980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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